잉글랜드의 영웅 빌 폴크스, 데니스 바이올렛 등과 더불어 찰턴은 이 비극적 사고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고 이는 잉글랜드 축구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난 그는 1958년 4월 19일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한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린 후 1958-59시즌 리그에서만 29골을 터뜨리는 활약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준우승을 견인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선 벤치를 지켰던 찰튼이지만 그의 잉글랜드 대표 팀에서의 영향력 또한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칠레에서 펼쳐진 1962년 월드컵에서 완벽한 주전으로 활약한 찰튼은 아르헨티나 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잉글랜드의 준준결승 행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물론 잉글랜드는 당대의 재능 가린샤를 앞세운 브라질에 패함으로써 다시 한 번 짐을 쌌지만 그들에겐 찰튼을 중심으로 하는 더 나은 앞날이 약속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찰튼이 최고의 전성기에 올랐던 1966년, 잉글랜드는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의 기회를 맞이했고 그것은 ‘종가의 귀환’을 노리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대부분 선수들이 적절한 연령대를 달리고 있었던 데다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한 세 명의 선수가 중심축을 형성한 까닭이다. 수문장 고든 뱅크스, 그 앞을 지키는 바비 무어, 그리고 미드필드에서 공격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바비 찰튼이 바로 그들. 감독 알프 램지가 시도한 고전적 개념의 윙어를 두지 않는 전술(‘윙 없는 마술사(Wingless Wonders)’)도 틀림없이 효험을 봤다.
실로 오랜만에 좋은 선수들과 전술, 밸런스까지 갖춘 잉글랜드였지만 그래도 종가의 영광은 ‘뮌헨의 생존자’ 바비 찰튼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생각이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월드컵사에 길이 남을 가공할 중거리포를 터뜨렸던 찰턴은 특히 우승으로 가는 최대의 고비였던 준결승 포르투갈 전에서 당대 정상의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우를 거꾸러뜨리는 명경기를 남겼다. ‘골라인 논란’과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이 더 많은 화제를 뿌린 결승전에서도 찰튼은 젊은 프란츠 베켄바워와 벌인 ‘맨투맨 맞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둔다. 베켄바우어는 “찰튼이 나보다 아주 조금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우리를 이겼다”고 술회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웅 찰튼의 전설은 월드컵에 그치지 않는다. 1958년의 뮌헨 참사로부터 정확히 10년이 경과한 1968년, 찰튼의 소속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해 포르투갈 명문 벤피카와 웸블리에서 일전을 겨루게 됐다. 이는 버스비 감독의 경이적인 팀 재건의 결과였다. 버스비는 뮌헨의 일부 생존자들, 새롭게 키워낸 아이들, 탁월한 안목으로 스카우트해온 선수들로써 클럽을 다시 일으켰고 이제 찰튼의 곁에는 세계 정상급 스트라이커 데니스 로(스코틀랜드)와 ‘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마술사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가 포진하고 있었다. 로, 찰튼, 베스트가 2년 간격으로 유럽 골든볼을 한 차례씩 거머쥐었음을 고려하면 당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보유한 재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찰턴과 베스트는 결승전에서도 건재했다. 찰튼의 ‘그의 경력에서 매우 보기 드문’ 헤딩골과 그라싸의 만회골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93분 경, 베스트가 수비수 앞에서 볼을 사라지게 했던 저 유명한 골을 터뜨렸을 때 웸블리는 실로 들썩거렸다. 그리고 브라이언 키드의 추가골에 이어 99분 터져 나온 찰턴의 피날레 골이야말로 그의 빛나는 커리어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뮌헨의 비극으로부터 마침내 돌아왔고 이는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유럽 제패이기도 했다.
선수 교체의 교훈 찰튼의 커리어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알프 램지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그 에피소드의 다른 주인공들이다. 시간이 더 흘러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을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기록되게끔 한 그 월드컵에서 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는 여전히 브라질을 추격하는 가장 유력한 도전자였다. 실제로 잉글랜드는 당시의 브라질과 근접한 승부(브라질의 1-0 승)를 펼친 유일한 팀으로 기록된다. 펠레를 위시해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손, 카를로스 알베르투가 포진한 브라질은 잉글랜드 전 한 경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경기들에서 세 골, 네 골을 퍼부었고 그것은 결승전에서조차 예외가 아니었던 것.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 이어 2위가 된 잉글랜드는 4년 전의 결승 상대 서독과 준준결승에서 조우한다. 그 경기에서 미드필드와 공격을 조율하는 찰튼의 존재는 그의 맞상대 프란츠 베켄바워의 자유로운 공격 가담을 억제하는 효과를 낳고 있었고 잉글랜드는 68분에 이르기까지 2-0의 리드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베켄바워가 한 골을 만회해 2-1이 되었을 때 바로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잉글랜드 감독 램지는 노장으로 접어든 찰튼의 체력을 걱정해 그를 교체했는데, 찰튼이 사라진 잉글랜드가 중심을 잃고 흔들린 반면 수비 부담에서 벗어난 베켄바워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바야흐로 서독의 ‘역전 본능’이 발현되기 시작했고 우베 젤러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전 게르트 뮐러의 골이 터지면서 잉글랜드는 속절없이 짐을 쌌다. 이것은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 드라마였던 동시에 1970년 월드컵부터 도입된 ‘선수 교체’가 승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전설적인 바비 찰튼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였다.
잉글랜드 역대 최고 찰튼은 그의 클럽 동료 조지 베스트와 같이 여러 명의 상대 선수를 혼자서 농락하며 즐거워하는 유형의 천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수준급의 테크닉을 장착하고 있었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가공할 킥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격수와 미드필더 위치에서 모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성실한 활동량으로 수비에도 도움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한 마디로 모든 측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선수였다.
적어도 필자의 생각으론 잉글랜드에는 아직도 찰튼을 뛰어넘은 선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찰튼의 잉글랜드 대표 최다 골 기록(49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다 골 기록(249골)은 여전히 깨지기 어려운 아성으로 남아있다. 기록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그는 표류하던 ‘종가’에 월드컵을 안겨줬으며 잉글랜드 리그 클럽이 최초의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리는 일의 중심에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웨인 루니가 찰튼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후보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 루니는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해내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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