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의 준우승 마테우스는 1979년 당대의 강호였던 보루시아 뮌헨글라드바흐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자신감 넘치는 미드필드 플레이로써 팀의 UEFA컵 결승 진출에 공헌한 그는 서독 국가대표 팀의 일원이 되어 1980년 유럽선수권에 참가한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마테우스는 비록 주전은 아니었으나 선수 경력의 첫 번째 큰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경험을 누리게 된다. 2년 후 처음 밟아 본 월드컵 무대에서도 그는 여전히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했고 두 차례 교체 출전으로 만족해야 했다. 서독은 논란의 승부 끝에 프랑스를 제치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그 월드컵의 주인공은 파올로 로시와 이탈리아였다.
1984년, 마테우스는 ‘독일 축구의 자존심’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진정한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독일 클럽사의 우승 제조기 우도 라텍 감독은 마테우스에게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부여했는데 마테우스는 이적 첫 시즌 리그 16골을 터뜨리는 대활약으로 바이에른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견인한다. 그는 마침내 베켄바워가 지휘봉을 잡은 1986년 월드컵 대표 팀에서 핵심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고 서독은 다시 한 번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독은 최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 월드컵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라도나 한 사람을 위한 대회였던 것이다.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한 마테우스는 이번에는 서독의 주장으로서 1988년 유럽선수권 우승에 도전했다. 하지만 전성기를 구가하는 ‘토털 풋볼의 후예들’과 맞닥뜨린 준결승에서 서독은 마테우스의 페널티킥 선취골에도 불구, 로날드 쿠만의 페널티킥 동점골에 이어 ‘우아한 테크닉의 스트라이커’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경기 막판 역전골을 허용함으로써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켰다. 틀림없이 당시의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시대의 선배들 못지않은 재능으로 무장한 팀이었다.
하지만 마테우스는 이미 독일 밖 명문 클럽들의 구애를 받는 선수가 되어 있었고 결국 1988년, 당대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A에 입성한다. 행선지는 인터 밀란. 인터에서의 첫 시즌 마테우스는 바이에른에서부터 그와 동행한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더불어 이탈리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이 1988-89시즌 인터의 우승은 훗날 로베르토 만치니가 이끄는 인터가 다시금 정상에 오를 때까지 인터의 마지막 우승으로 남아있게 된다. 인터는 그 다음 시즌 슈투트가르트의 위르겐 클린스만을 영입, ‘게르만 삼총사’를 구축해 AC 밀란의 ‘오렌지 삼총사’에 맞서고자 했다.
완벽한 챔피언 마침내 마테우스와 독일에 영원히 기억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찾아왔다. 그것은 ‘서독’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는 마지막 월드컵이었고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준우승의 문턱을 넘어 정상을 오를 것을 갈망했다. ‘압박 전술’이 키워드로 부상한 그 월드컵에서 대부분의 팀들은 공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력 차가 뚜렷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골을 터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의 경우는 예외였다. 서독은 조직적인 압박으로 상대를 괴롭히면서도 플레이메이커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미드필드에서의 정확한 연계력을 과시했고 전방에서는 결정력과 기본기를 겸비한 대형 공격수들(클린스만, 루디 펠러)이 제 몫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는 공격수들 못지않은 마테우스와 브레메의 득점포가 존재했다. 서독은 틀림없이 고도의 안정성에 파괴력을 겸비한 가장 무서운 팀이었다.
이러한 서독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전통의 라이벌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조우한 16강전과 준결승이 그것이었다. 그 두 경기는 압박 축구로 대별되는 1990년 월드컵 최고의 승부들임에 틀림이 없었고 팽팽한 긴장감을 낳았다. 그러나 두 경기 모두에서 최후의 승자는 서독이었다.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2년 전 유럽선수권에서와 같은 위력을 발산하지 못했으며,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서독의 평정심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서독의 결승 상대는 4년 전 그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하지만 마라도나 자체의 위력이 4년 전에 비해 감소한 데다 전반적인 전력 면에서도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서독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마테우스는 두 차례의 준우승 끝에 세 번째 참가한 월드컵에서 감격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974년 서독 월드컵에 이은 서독의 세 번째 월드컵 정상 등극이었다. 이전의 두 차례 우승 당시 더 나은 팀들( 1954년 헝가리, 1974년 네덜란드)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서독은 마침내 대회 최고의 팀으로서 월드컵을 가져가는 역사를 쓰게 된다.
기나긴 여정 1992년 마테우스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왔다. 연령에 따른 속도 저하는 그의 역할을 미드필더로부터 수비수로 전환하게끔 했는데, 이는 마테우스로 하여금 저 위대한 베켄바워의 전통을 따르도록 하는 일이었다. 마테우스는 베켄바워의 또 다른 이름과도 같은 ‘리베로’로서 그의 커리어 후반을 보낸다.
마테우스는 다시 한 번 독일을 이끌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이 때의 독일은 4년 전의 위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세대교체 실패’의 기운이 역력했던 독일은 결국 준준결승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존재하는 불가리아에 패퇴한다. 이후 마테우스는 대표 팀을 떠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가 여전히 위력적인 공격수 클린스만과 불화를 겪고 있었던 데다 이미 독일은 마테우스의 자리를 대신할 그릇인 마티아스 잠머를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마테우스는 1996년 유럽선수권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선수권의 스타’ 잠머가 부상으로 쓰러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독일 감독 베르티 포그츠의 선택은 결국 37세의 마테우스였다. 그러나 유럽선수권 우승으로 ‘반짝’했던 독일은 이 월드컵에서 다시 4년 전과 유사한 결과를 낳으며 실망감만을 안겨줬다. 16강 멕시코 전을 간신히 통과한 독일은 준준결승에서 이번에는 크로아티아를 만나 0-3으로 참패하고 만다.
2년 후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에 진출하기도 했던 마테우스는 마침내 2000년 유럽선수권에서 그의 장구한 커리어의 마지막 A매치들(마테우스의 A매치 출전 횟수는 150회에 달한다)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독일은 조별리그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는 하락세를 타고 있던 독일 축구의 좋지 않은 사정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독일은 그들이 자랑하던 ‘사령관’ 마테우스의 쇠락과 더불어 하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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