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아마추어 대회인 올림픽 축구에 소극적이었던 잉글랜드는 “프로 선수들을 참가시킨다면 남미는 당연히 유럽의 상대가 될 수 없다.”며 남미 축구의 강력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줄 리메 회장은 이를 놓칠 수 없는 기회로 간주하고 올림픽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피파 총회를 열었다. 줄 리메의 주장은 “프로 선수들까지 총동원하여 유럽과 남미의 힘을 제대로 겨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인 월드컵의 개최가 필요하다”였다.
또한 같은 시기 IOC는 다음 대회인 1932년 LA 올림픽의 정식 종목에서 축구를 제외시키겠다는 방침을 피파 측에 통보했다. 이미 IOC는 피파와 아마추어 선수를 구분하는 기준 및 휴업 보상제도 등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어 오던 차였다. 뿐만 아니라 IOC와 LA 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은 야구와 미식축구가 성행하는 미국에서 축구로는 별다른 흥행이나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 인해 올림픽 역사상 유일무이한 축구의 정식종목 제외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줄 리메와 그를 지지하던 전 세계 축구인들은 더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28년, 피파는 제1회 월드컵을 2년 뒤인 1930년에, 그리고 다음 대회를 4년마다 한 번씩 개최할 것을 찬성 25, 반대 5로 가결했다. 또한 1930년 제1회 월드컵을 20년대 올림픽 축구를 2연패한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진정한 세계선수권대회로 거듭나기까지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월드컵이었지만 제1회 대회는 기대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1924년에 재가입했던 영국이 1928년 들어 다시 한 번 피파를 탈퇴해 버렸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남미의 우루과이를 초대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한 피파 측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루과이가 개최국으로 확정된 이후 유럽 국가들의 참가 신청서는 피파 측에 단 한 장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크게 분노했고, 심지어 유럽에서는 “피파의 도움 없이 유럽선수권대회를 따로 치르자”는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줄 리메는 남미 측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한편 유럽 국가들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다시 한 번 두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초대 월드컵 참가에 난색을 표한 이유는 비단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비행기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이 남미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2주 이상의 부담스런 항해를 감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동 및 대회 기간을 포함하여 2개월 가까이 주축 선수들을 대표팀에 내줘야 하는 유럽 각국의 클럽들도 거세게 반발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줄 리메는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모국 프랑스와 유고, 벨기에, 루마니아까지 총 4개국을 초대 월드컵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단, 이들 4개국만으로는 당초 16개국으로 예정되어 있던 월드컵 출전국 머릿수를 모두 채울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초대 월드컵은 예선 없이 13개국만을 참가시키는 조촐한 형태로 치러졌다.
이 문제는 1회 대회 이후에도 30년대 내내 계속됐다. 유럽에서 열리는 1934년과 1938년 대회에 우루과이가 2연속으로 불참하고, 아르헨티나 역시 1934년 대회에 2진을 내보낸 뒤 1938년 대회에 불참하는 등 유럽과 남미간의 감정 다툼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러던 월드컵이 마침내 진정한 세계선수권대회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제4회 1954년 스위스 대회에 이르러서였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