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6, 2011

프란츠 베켄바워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전 세계를 통틀어 축구라는 스포츠와 관련해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보낸 인물은 누굴까?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분명 다양하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범주에 프란츠 베켄바워를 포함시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세 차례 월드컵에 선수로 출전, 우승과 준우승, 3위를 모두 경험했으며 감독으로서도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주장과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들어 올린 유일한 축구인일 뿐 아니라, 클럽 축구에서도 주장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국과 클럽을 위한 축구 행정에 있어서도 최고의 직책들을 역임했으니 다른 이들의 커리어는 ‘카이저(Der Kaiser)’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리베로’에 생명력을
동시대의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가 그러했듯 베켄바워 또한 축구사를 빛낸 혁명가이자 그라운드 위의 사령관이었다. 둘 사이의 적잖은 공통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공히 위대한 축구 사조 ‘토털 풋볼(Total Football)’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은 괄목할 만하다. 당대의 네덜란드와 서독은 항상적으로 비슷하지는 않았던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넓은 시각에서 토털 풋볼의 ‘시대적 동반자’로 간주될 수 있는데, 특히 서독으로 하여금 토털 풋볼의 성격을 띠게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공격하는 수비수’ 베켄바워의 존재였다.

베켄바워는 이탈리아 축구의 ‘카테나치오(Catenaccio)’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자신과 자신의 팀에 꼭 맞는 스타일로 발전, 정착시켰다. 1960년 인터밀란 지휘봉을 잡은 아르헨티나 출신 지도자 엘레니오 에레라는 대인마크 부담을 지니지 않는 - 따라서 자유인을 의미하는 ‘리베로(Libero)’라 불릴 수 있는 - 최후방 수비수, 즉 스위퍼 한 명(아르만도 피키)을 수비수들 뒤쪽에 위치시키는 시스템으로써 클럽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카테나치오의 가장 성공적인 형태였다. 또한 에레라의 시스템에서 왼쪽 수비수(지아친토 파케티)는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현대적 풀백의 시조와도 같은 성향을 띠었다.

영원한 리베로, 영원한 챔피언
<출처 : wikipedia(Mittelstädt, Rainer)>

이 시스템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베켄바워는 리베로의 자유로움과 풀백의 공격 가담을 자신을 통해 결합시켰다. 인터 밀란의 리베로 피키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비수였던 데 반해 베켄바워는 대인마크를 담당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훨씬 더 공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특히 베켄바워가 보유한 축구적 지능과 게임을 읽는 시야는 물론, 당대의 수비수라 하기엔 믿기지 않으리만치 우아했던 기본기 및 드리블 솜씨는 베켄바워를 완전무결한 ‘공격하는 수비수’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리베로’의 개념은 결국 베켄바워에 의해 더 많은 생명력이 불어넣어졌고 세련미를 더하게 됐다. 따라서 그가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리베로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켄바워처럼 세련된 수비를 펼치면서 베켄바워처럼 공수를 조율하고 베켄바워처럼 날카롭게 전진해 골을 넣는 선수는 요즈음에 이르기까지도 도대체 보기가 드물다.


찰턴과 크루이프
베켄바워의 선수 경력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훌륭한 적수들이 있으니 바로 잉글랜드의 바비 찰튼과 네덜란드의 크루이프다.1966년 베켄바워가 약관 20세의 나이로 출전한 그의 첫 번째 월드컵에서 서독은 결승에 올라 개최국 잉글랜드와 우승을 다투게 됐고, 이 결승전에서 베켄바워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잉글랜드 에이스 찰튼과 서로의 마크맨과도 같은 한 판 대결을 펼친다. 찰튼이 공격을 하면 베켄바워가 수비를 했고 베켄바워가 올라갈 적에는 찰턴이 그것을 방해했다. 어쩌면 연장전의 ‘골 라인 논란’과 제프 허스트의 해트트릭이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긴 경기이기는 했지만 둘의 맞대결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승부였다.

결국 이 대결은 당시로선 더 노련했던 찰턴의 판정승으로 마감되었고 우승을 차지한 쪽도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베켄바워는 이 월드컵에서 포지션의 핸디캡에도 불구, 기발하고도 세련된 공격 가담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려 네 골을 터뜨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베켄바워가 더욱 성숙해진 1970년, 준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서독과 잉글랜드의 승자는 이번에는 서독이었다. 베켄바워는 그 경기에서 중요한 추격골을 터뜨렸으며 그 경기는 찰턴에겐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1974년 베켄바워의 결승전 상대는 이번에는 크루이프였다. 베켄바워와 크루이프는 펠레 시대 이후 1970년대 축구를 양분하다시피 했던 가장 위대한 선수들이자 당대의 혁명적 축구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 대결은 ‘사령관 대 사령관’, ‘토털 풋볼 대 토털 풋볼’, ‘토털 풋볼 대 리베로’를 비롯한 다양한 문구들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팀 대 팀’의 관점에서 네덜란드는 서독보다 더 나은 팀이었다. 토털 풋볼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사하고 있었던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는 축구사 전체를 논할 적에도 1970년 ‘펠레와 친구들’의 브라질, 1954년 푸스카스의 ‘무적 헝가리’와 더불어 세 손가락에 꼽힐 수 있을 법한 막강한 팀. 결승에 오르기 전 네덜란드는 이 대회에서 브라질을 2-0으로 완파하기도 했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결승전 킥오프 직후 단 한 차례도 볼을 빼앗기지 않은 상태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보란 듯 앞서 나아갔다.

그러나 베켄바워가 지휘하는 서독은 자신들의 주무기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베르티 포그츠가 크루이프에 대한 대인방어에 성공하면서 경기의 흐름은 바뀌었다. 베켄바워와 울리 회네스, 볼프강 오버라트가 미드필드 장악에 성공했고 서독은 끝내 역전에 성공한다. 크루이프에겐 아쉬운 일이었으나 베켄바워는 마침내 자신의 세 번째 월드컵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진정한 챔피언이 되었다. 베켄바워는 “그(크루이프)가 더 나은 선수였지만 내가 월드컵을 차지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슴 아픈 명승부
베켄바워의 월드컵 커리어 안에는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승부로 일컬어지는 경기가 포함된다. 다름 아닌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 서독과 이탈리아의 대결이 그것이다. 장구한 월드컵의 역사에는 무수한 명승부들이 존재하지만 이 경기만큼 짜릿했던 각본 없는 드라마는 흔치가 않다. 준준결승에서 잉글랜드와의 연장 승부 끝에 극적인 역전 드라마-이 또한 틀림없는 월드컵사의 명승부-를 연출했던 서독은 준결승에서 1968년 유럽선수권을 제패한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하게 된다. 아주리의 카테나치오는 서서히 한계점에 부딪고 있었으나 그 대신 이탈리아에는 루이지 리바, 로베르토 보닌세냐, 지아니 리베라, 산드로 마졸라와 같은 공격 재능들이 존재했다.

보닌세냐의 골로 경기 막판까지 끌려가던 서독은 종료 직전 칼 하인츠 슈넬링거가 동점골을 터뜨려 다시 한 번 연장전을 맞이하게 됐다. 연장전 두 골씩을 주고받아 3-3이 된 상황에서 111분 이탈리아의 리베라가 다시 한 번 골을 터뜨렸고 ‘드라마 전문’인 서독의 뒷심도 이번만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연장전에서만 다섯 골이 쏟아졌던 이 승부는 이탈리아의 4-3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 놀라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실로 놀라운 투혼을 선보였다. 그는 어깨가 탈구된 상태에서도 삼각건에 의지하며 경기를 끝까지 소화하는 잊지 못할 풍경을 연출했다. 베켄바워는 3,4위전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서독은 우루과이를 꺾고 3위를 차지한다.


계속되는 성공
1984년 7월 베켄바워는 서독 국가대표 팀의 감독으로 임명돼 이번에는 지도자로서 월드컵 도전에 나섰다. 1986년 월드컵에서 베켄바워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당시의 서독을 결승에 진출시킨 것으로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만했다. 칼 하인츠 루메니게의 연령이 높아지고 있던 서독은 그 월드컵을 평정하다시피 한 디에고 마라도나를 극복하기엔 근본적으로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감독 베켄바워의 두 번째 도전은 위대한 귀결을 낳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통독 이전 ‘서독’으로 출전하는 최후의 월드컵이었고 서독은 이 대회에서 무패로써 정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서독은 이른바 ‘오렌지 삼총사’가 버틴 토털 풋볼의 후예 네덜란드를 물리쳤고(이것은 1988 유럽선수권의 설욕이기도 했다) 준결승에서는 종가 잉글랜드를 승부차기로 잠재웠다. 베켄바워는 그가 선수 시절에 그렇게 했듯이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를 넘어섰으며, 결승에서는 4년 전의 승자였던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이번에는 패자로 만들었다. 이후 베켄바워는 친정 팀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과 독일축구협회 부회장을 거쳐 2006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장으로도 맹활약을 펼쳤다.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은 월드컵과 관련된 모든 행보에 있어 지극히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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