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6, 2011

지네딘 지단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990년대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압박 전술은 플레이메이커들로부터 공간적·시간적 여유를 빼앗아가며 매우 불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지네딘 지단은 이러한 현대축구의 환경 속에서도 유유히 자신의 플레이를 즐겼고, 특유의 느릿한 플레이 스타일에 조금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스페인 일간지 <아스>의 인상 깊은 한 구절에 따르면, 지단은 ‘압박의 숲속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테크닉의 소유자였다.


이방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지단은 개최국 프랑스를 첫 우승으로 이끌 최고의 스타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단이 호나우두(브라질), 데니스 베르캄프(네덜란드) 등과 함께 대회 MVP 자리를 놓고 다툴 것이라 예상했고, 프랑스와 남아공의 첫 경기 이후 그 기대치는 점차 높아져만 갔다. 이 경기에서 보여준 지단의 활약상이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단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상대 선수를 발로 밟는 비신사적인 반칙으로 퇴장을 당했다. 세계적인 스타 선수로서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지단에게 곧바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외침은 더욱 혹독했다. “만약 지단이 알제리 대표팀 소속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면 그 따위 반칙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지단을 이방인 취급하는 일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실제로 지단은 이방인이었다. 알제리 출신 베르베르 카빌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지단은 오늘날 프랑스 대표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민 2세 선수다. 삼촌 자멜 지단도 알제리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1982년, 1986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던 지단이 프랑스의 진정한 영웅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월드컵 우승 트로피가 필요했던 셈이다.

'현대 축구의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
<출처 : wikipedia(William Lionheart)>

2경기 출장정지를 당한 지단은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 이르러서야 선발 라인업으로 복귀했다. 그 활약상은 전반적으로 무난했고, 크로아티아와의 4강전에서도 노련한 경기운영을 앞세워 승리에 공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대회 전체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대회 내내 최고의 활약을 펼친 브라질의 호나우두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지단은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마침내 진가를 발휘했다.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으로만 두 골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90분 내내 완벽하게 미드필드를 지배하며 프랑스를 3-0 승리로 이끈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 첫 우승이 확정되자 파리 시내에는 수십 만의 인파가 몰려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국기와 함께 알제리 국기를 양 손에 쥐고 힘차게 흔들었다. 이방인 지단이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 그리고 추락
1998년 월드컵 이후 세계 축구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단 중심으로 돌아갔다. 유로 2000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다시 한 번 프랑스에 우승컵을 안겨줬고, 이듬 해 여름에는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였던 7,500만 유로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지단은 01/02 시즌 챔피언스리그 맹활약을 통해 MVP로 선정되는 한편, 고대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까지 누렸다.

비록 2002년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프랑스의 조별리그 탈락을 막아낼 수 없었지만, 02/03 시즌에도 지단의 전성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의 활약상은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될 정도다. 심지어 맨유의 주장 로이 킨은 “모자를 벗어 지단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이례적인 찬사를 남기기까지 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유벤투스의 벽을 넘지 못해 4강에서 탈락했지만, 그 해 지단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03/04 시즌부터는 서서히 하향세 조짐을 드러냈고, 유로 2004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단의 시대가 결국 막을 내렸다” 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그 후 지단이 보여준 플레이는 전성기 시절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반면 같은 시기에 브라질의 호나우지뉴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떠올랐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지단은 어느덧 34세 노장이 됐다. 프랑스 대표팀 역시 도메네크 감독의 휘하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만큼, 당초 프랑스와 지단을 향한 기대치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사람들은 이 대회가 호나우지뉴의 독무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34세 노장의 원맨쇼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는 당초 예상대로 대회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스위스와 무기력하게 0-0으로 비긴 후 대한민국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도 막판 뒷심 부족으로 1-1 무승부를 허용했다. 최약체 토고를 누르고 간신히 16강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팀은 페르난도 토레스와 다비드 비야가 이끄는 젊고 활기 찬 스페인이었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열세를 예상했고, 선취골도 스페인 쪽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단은 위기 상황에 힘을 발휘할 줄 아는 해결사인 동시에 큰 무대에 강한 타고난 스타플레이어였다. 스페인의 막강 미드필드진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경기운영 능력을 선보인 지단은 결국 2-1 역전을 이끌어냈고, 종료 직전에는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골까지 작렬시켰다.

8강에서 지단과 프랑스는 최강 브라질을 상대 팀으로 맞아들였다. 브라질 입장에서는 8년 전 결승전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경기에서 지단은 만 34세의 나이로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노익장을 발휘해 화제를 모았다. 전성기 시절의 우아한 볼터치와 미드필드 장악 능력을 모처럼 재현해낸 지단이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와 같은 최고의 스타들을 모두 경기의 조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브라질을 1-0으로 침몰시킨 프랑스는 준결승에 올랐고, 상대 팀은 루이스 피구가 이끄는 포르투갈이었다. 지단은 이 경기에서도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작렬시켜 프랑스를 8년 만에 결승으로 이끄는 수훈을 세웠다. 어느덧 2006년 대회 전체는 34세 노장의 독무대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지단은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마테라치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 유명한 ‘박치기 사건’으로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 역시 승부차기에서 무릎을 꿇고 준우승에 머무르며 분루를 삼켰다. 이 결승전은 지단의 현역 은퇴경기였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마테라치와의 ‘박치기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사건의 원인은 마테라치가 신경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지단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인종적, 성적 모욕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이상의 구체적인 전말은 분명치 않다. 지단은 2010년 3월 <엘 파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가 병상에서 위독한 상황이었는데 마테라치는 몇 번이고 어머니를 모욕하는 발언을 입에 담았다. TV로 당시 경기를 지켜보던 어린이들에겐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마테라치에겐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은퇴 후 평가
지단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유럽 각국 언론들에 의해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에 비견될 수 있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란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데이비드 베컴과 호나우지뉴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경우 “내가 두 눈으로 지켜 본 선수들 가운데 최고”라며 레알 마드리드 출신 후배를 추켜세웠다.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찰튼 역시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들 가운데 한 명”이란 호평을 내렸고, 프랑스 출신 선배 미셸 플라티니는 “상대의 압박을 이겨내며 볼을 컨트롤하고, 그것을 다시 정확하게 패스하는 능력만큼은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지단을 따라갈 선수가 없을 것”이라며 좀 더 자세한 평가를 내놓았다. 요한 크루이프도 “압박을 이겨내기 위한 기술적인 측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있는 선수”라며 플라티니와 의견을 같이 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뀌프>의 경우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 베켄바워, 플라티니 등이 아닌 바로 지네딘 지단”이란 평가를 내놓았는데, 그 대표적인 이유로는 완벽에 가까웠던 테크닉과 해결사적 기질 이외에도 사상 초유의 ‘그랜드 슬램’ 기록이 손꼽혔다. 지단은 월드컵 우승, 월드컵 MVP, 유럽선수권대회 우승, 유럽선수권대회 MVP, 챔피언스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MVP,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차지한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선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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